[기고]한글과 한자의 국적에 얽힌 문제들
[기고]한글과 한자의 국적에 얽힌 문제들
한자도 한글과 더불어 나라글자이다. 지난해 10월의 갤럽 여론 조사에서 40% 넘는 사람들이 이런 주장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문교육 정상화 추진위에서는 국어기본법 제3조에서 한글을 ‘국어를 적는 우리의 고유 문자’로 뜻매김하여 한자를 나라글자에서 배제한 것이 위헌이라며 2012년 10월 정부를 상대로 헌법소원을 냈다. 국민의 자유 선택권을 제한하기에 위헌이라는 것이다. 지난 5월12일 헌법재판소에서 공개 변론을 거쳤고 올해 안으로 판결이 나오리라고 한다. 여기에는 여러 문제가 얽혀 있다.
한글이 우리의 고유한 문자인가? 딱히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다. 뜻이 빠진 형식적 기호로서의 꼴과 소릿값만 남은 알파벳 낱자들은 국경을 쉽게 넘어 쓰일 수밖에 없으며 한글도 엄연히 알파벳의 하나다. 이미 인도네시아의 일부에서 한글을 소수 부족어를 적는 데 쓰고 있다. 따라서 한글이 우리에게 고유하다는 규정은 어디까지나 과거에 한정된다. 알파벳의 고유성이나 국적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국어기본법의 한글에 대한 뜻매김은 부적절하다.
한자도 흔히 말하듯 우리나라 글자일까. 일단 한자를 기호로 보자. 그 기의를 뜻으로, 기표를 시각적 꼴로 본다면 시각적 꼴로서의 한자는 분명 우리 것이 아니며 앞으로도 우리 것이 될 수 없다. 기의는 대개 공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한자의 음을 기표로 본다면 한국 한자음은 중국 한자음의 방언적 변이에 해당한다. 어느 모로 보나 한자는 우리 것이 될 수 없다. 이런 사정은 일본과 대비된다.
일본의 훈독 전통에서는 한자를 일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木”이란 기호를 기표의 차원에서 보면 세 가지가 있다. 시각적 기표, 중국식 청각적 기표, 일본 고유어에 따른 청각적 기표가 그것이다. “木”을 뜻으로 읽으면 시각적 기표의 차원에서만 중국 것이 된다. 뜻으로 읽는 일본에서는 일본 고유어의 소리와 뜻으로 이해된다. 특수한 경우에 그 시각적 형태를 의식적으로 대상화하지 않는 한 한자나 한문은 일본어를 적은 것이 된다. 그러나 한자를 중국식 소리 기표로만 읽는 ‘전통’이 깊은 우리에게는 이러한 길이 막혀 있다. 조선과 일본에서 한자는 성격이 매우 다르다. 조선은 주체적 문화 건설의 길을 스스로 버린 셈이다. 한자가 동아시아 세 나라의 공통 글자라거나 우리에게 귀화한 글자라 보는 생각은 비판적 검토를 거치지 않은 것이다.
한자는 중국 것이고 한글은 우리 것이다. 그런데 우리 것이기에 우리가 아끼고 써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가. 아니다. 우리가 이런 결론으로 쉽게 내달린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중국과 다른 조선의 독자적 문화는 오랫동안 배척의 대상이었다. 그것은 오랑캐가 되는 일로서 사대모화에 부끄러운 일이었다. 언문은 우리 것이기에 빨리 버려야 하는 것이었다. 유길준은 <서유견문>에서 언문을 섞어 썼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책을 ‘우리 글자’로만 쓰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긴다고 표현하였다. 이는 전통적인 생각과 반대된다. 한글이 우리 것이기에 버려야 한다거나 써야 한다는 주장은 모두 논리적 비약으로 발생론적 오류에 속한다. 그런 결론을 내려면 심리적 이데올로기적 전제가 더 필요하다.
한자는 뜻이 소리와 함께 가기 때문에 훈독을 하지 않는 한 국경을 넘어가지 못한다. 이 점에서 라틴 알파벳이나 한글과 차이가 크다. 이미지 형태로서의 한자는 국경을 쉽게 넘지만 이때는 문자로서의 성격을 잃어버린다. 한자를 우리 것이라 할 수 있는 길은 없다. 또 한자가 우리 것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한자를 써야 한다는 주장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원문보기: 김영환 한글철학연구소장·부경대 교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6232